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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교양/정치

사회적, 정치적 관점에서 본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

by Gamangee 2022. 7. 23.

 광화문과 종로에선 매일 시위와 집회가 벌어진다. 정치적 이슈를 두고 보수와 진보 간 몸싸움도 자주 벌어진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 상대방 정당과 지지자들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조롱한다. 보수와 진보는 왜 그렇게 서로를 미워할까? 같은 주제에 대해 왜 그렇게 입장 차가 크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까? 자신들이 틀렸다는 생각은 절대 못 하는 것 같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틀렸다고 믿는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정치인들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싸운다. 한국 말고도 정치인들의 멱살잡이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인종과 문화, 국가를 막론하고 보수와 진보는 서로를 싫어하는 것 같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과 논리체계는 너무나 탄탄해서 토론은 절대 합의에 도달하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토론을 통해 더 나은 대안과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 정당의 거짓말과 오류를 찾아내고 자신이 믿는 정당의 논리를 방어하기 위해 토론이 존재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치와 관련된 모두에게 나타나는 태도, 보수와 진보 모두 자신이 옳고 상대가 틀렸다고 믿는 것을 보고 우연히 생각이 들었다.‘세계 어디서나 보수와 진보가 확연히 다르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한 궁극적 원인이 있는 게 아닐까?’ 문화 차이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면, 보수와 진보가 다른 이유가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물학적 차이를 유발한 진화론적인 이유가 있으며, 실험으로 보수와 진보의 일관된 차이가 나타날 거라 추론하는 건 지극히 타당해 보였다.

 보수와 진보가 다르게 태어난다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그 기저에는 근본적이고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보수주의자 거나 진보주의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있어서,  최적화된 방향으로 세상을 인지하도록 만들 것이다. 보수주의자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진보주의자가 되는 상황은 그만큼 세상을 지각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만들  테니까 말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렇게 일관성 없는 인지 체계를 지녔다면 생존에 불리해 자연선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후손인 우리들도 똑같은 심리 기제를 가지고 태어나서 특정 정치 성향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진 뇌로 정치적 문제에 대응할 것이다. 그래서 보수 혹은 진보의 언어를 사용해 지지하는 정치적 이념을 정당화할 것이다. 따라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뚜렷한 특징이 전 세계 어디서나 비슷하게 나타날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한다는 의미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뒤틀어 생각해보면, 언어로 어떤 존재를 규정하여 사고할 수 없다면, 그 사물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누이트 족들은 눈을 부르는 이름도 여러 개라고 한다. 우리가 눈의 여러 상태를 보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면, 그 눈은 이누이트의 눈과 동일한 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이름으로 존재를 정의하지 않으면, 기호로 기술된 존재의 속성과 사회적으로 합의된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즉, 우리에게 언어로 정의되지 않은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다만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올 뿐이다.

 보수와 진보도 서로 다르기에 사용하는 언어와 언어에 반영된 가치체계도 다르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 이누이트족이 사용하는 눈의 의미가 불확실한 것처럼, 보수와 진보도 서로를 불확실한 미지의 존재들로 느낄 것이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고, 우리는 그 사이에 다리를 놓을 생각조차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우리는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 미워하는 것은 아닐까. 

  20대 대선이 끝나고 시사IN에서 지지 정당에 대한 호감도와 상대 정당에 대한 비호감도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20대 대선의 비호감 당파성은 24.5%였다. 수치가 높아질수록 정치적 양극화의 정도가 심해진다고 볼 수 있는데, 트럼프 집권 시절 미국의 비호감 당파성이 9.9%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그 트럼프 때보다 3배나 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20대가 상대 정당에 대한 반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젊은 세대는 중도층이 많다고 알려진 통념과는 반대되는 현상이다. 20대가 나이를 먹으면 정치적 양극화는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사회가 더 팍팍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더 냉소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단순히 살기 힘들어서일까? 아니면 학업과 생업에 지쳐서 예민해진 것뿐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2022년 세계 GDP(국내총생산) 순위가 한국이 12위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세계 GDP 순위가 10위였고, 수출은 역대 최고의 흑자를 기록했다. 2022년엔 공식적으로 선진국으로 등록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옛날이 더 살기 좋았다고 느끼는 걸까? 최근의 레트로 열풍은 낭만과 순수가 사라져 버린 현재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거의 향수를 찾는 걸지도 모른다. 유행의 변화가 정치와 경제의 영역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생각은, 내겐 너무 순진하게 보인다. 

 세계 경제가 성장하면서도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은 사실 전 세계적 현상이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삶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우리 일상은 최신 기기와 물건들로 채워지는데, 우리는 더 불행해지고 있다. 2022년 한국의 행복도 지수는 59위다. 행복도 지수는 1인당 명목 GDP, 사회적 지원, 건강수명, 타인에 대한 관용, 국가 신뢰도(부패를 느끼는 정도)등을 반영해 수치화한다. 한국에서 특히 낮은 수치는 사회적 지원과 타인에 대한 관용이다. 둘 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척과 혐오와 관련이 깊다. 한국 사회가 혐오 사회라는 것을 실증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또 한국의 지수 중 낮은 것이 개인의 선택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질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학창 시절부터 시험을 위한 공부에만 12년 이상을 바치는 게 성실하고 착한 학생이라고 부르는 나라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것들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경험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기회 따위 주지 않는다. 성장기에 인간과 사회관계 속에서 배워나가야 하는 모든 것들을, 대학 입시를 위해 책 속에서만 경험하니 그것들이 개인의 실존 안에서 의미가 있을 리가 없다. 지능과 학력은 지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지성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능과 학력이 사람의 인성과 품격을 반영한다고 본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헛똑똑이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열심히 살아봐도 그 끝에 있는 건, 허무와 좌절, 그리고 분노뿐이다. 


 시험만 잘 치는 헛똑똑이들이 인생의 승리자라고 포장하는 사회에서 자란 세대가 벌써 3세대를 넘는다. 입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학창 시절 유일한 존재 이유라고 배우고 또 그렇게 자랐던 어른들이 자식들도 같은 방식으로 키우는 건 당연한 거고. 사회 시스템 역시 같은 방식으로 구축되었다. 20대 조차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시를 위해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인생에 정답이 있다고 믿으며 세상을 승리자와 실패자로 규정하고, 그런 사람들이 다수를 구성하는 게 현재 한국 사회다. 대학 입시 다음엔 대기업에 들어가 월급 많이 받고, 그다음엔 좋은 배우자 만나 결혼하고, 그다음엔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며 안정적으로 살아야 하고……

 이렇듯 각자 다른 성향과 선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지나치게 높은 이상적 기준에 들기 위해 평생을 경쟁하고 비교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는 사회라면,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불안과 분노가 일지 않을까? 평생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기계처럼 정해진 알고리즘에 맞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행복할리도 없고 말이다. 그러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분노에 대해 두 가지 대처 방식을 보인다. 첫 번째 방식은, 분노로 촉발된 공격성을 타인을 향해 투사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식은, 그 공격성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방식의 결과가 UN의 세계 행복도 지수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사회의 혐오와 타인에 대한 무관용 현상이다. 인간은 스트레스와 부정적 감정에 직면하면 자기 자아를 지키기 위해 부정적 감정들을 외부에 투사한다. 그래야만 자아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영리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방어적인 공격성을 투사하는 심리에 대해 스스로 합리화를 시도한다. 문제는 자신이 아닌 외부 요인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이 메커니즘은 깊은 무의식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의식에선 인식되지 않는다. 자신은 도덕적이라 믿으며 악행을 일삼는 인간의 본성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실험에서도 명확히 증명된다. 이런 심리 자체는 인종과 문화, 기타 다른 차이를 막론하고 인간 누구에게나 나타나지만,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약자에 대한 무관용을 증폭시키고 있다.


 반대로 지나치게 착한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객관적인 외부 원인마저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문제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 요인이기 때문에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의 공격성은 자기 자신을 향한다. 니체라면 그런 사람들이 진정 선한 것인가 따졌겠지만, 어쨌든 부정적 감정을 자신에게 돌릴 만큼 마음이 여린 사람들이 심리적인 문제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울증과 불안 증세를 보이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역설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회피하기도 한다. 한국의 자살률이 전 세계 1위인 이유에는 이런 점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한국 사회에선 타인에 대한 무관용, 낮은 행복도, 타인과의 비교로 인한 자존감 저하, 사회적 경직성과 폐쇄성, 개인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제약, 약자와 소수자 혐오 등의 문제가 중첩되어 나타난 게 OECD 최저의 행복도 지수다. 사회 전체적으로 불안과 스트레스, 두려움이 축적되다 보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패배감이 사람들에게 스며들고 있다. 자살률과 더불어 출산율은 삶이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과 관련이 있다. 이 두 가지가 전 세계 꼴찌를 기록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삶이 더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은 개인적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다면, 사회에서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의 영역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왜 존재하는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를 개선해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헌법이 명시해 놓은 이유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존재하는 이유기도 하다.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무능력 때문에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의 무능은 곧 사회의 무능이기도 하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의 대가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치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연대와 관용이 약해질수록 개인은 소외된다. 소외되고 연대하지 못한 개인은 권력의 횡포 앞에 무력할 뿐이다. 소외되고 단절된 개인은 보다 큰 사회적 차원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단기적인 이익에 몰두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경쟁적인 사회가 된다. 지나치게 경쟁적인 사회는 앞서 말한 사회적 문제들을 확대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정치인들 탓만 하기엔 우리의 책임이 너무 크다. 정치는 사회 불의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결과이기도 하다. 정치의 수준이 한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는 이유다. 

 그렇다고 정치권에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시사IN의 설문조사 결과는 지지하는 정당에 대한 호감보다 상대 정당에 대한 비호감도가 더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보수와 진보 모두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가치와 비전을 제대로 어필하지 못한 채 권력 투쟁에만 몰두했다는 뜻이다. 보수와 진보 정당 모두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불만과 요구를 경청할 노력을 하지 않았고, 정책적 해법도 내놓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지 정당조차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또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치권의 무능은 정치적 혐오, 무관심과 맹목적인 진영논리의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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