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한 근본적 원인은 지리에 있다. 지중해에서 어업과 상업에 종사하던 해양 문명에서 자연스럽게 개인주의적이고 평등한 사고방식이 발달했기에 민주주의가 제도로 정착될 수 있었다.
왜 민주주의는 서양에서 발달했을까. 서양 문화권은 대부분 민주주의가 잘 정착되어 있다. 반면 동양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는 몇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 제도는 가지고 있지만, 일본처럼 일당 독재거나 동남아와 아프리카에선 독재자가 몇 십년 동안 지배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국가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야 민주주의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문화권에선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봐도 왕정 국가가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중동과 이슬람 문화권에선 서구식 민주주의에 반감까지 가지고 있다. 반면 영국은 1689년 권리장전이 선포된 지 300년도 넘었다. 서구 시민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는 DNA 라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한 번쯤 의문을 가져볼 법한 문제다.
서구 문화권에선 정치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알아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정치를 뜻하는 단어는 영어로 "Politics"다. 고대 그리스어로 도시국가를 뜻하는 Polis 에서 나온 단어다. 고대 그리스에는 조그만 섬들의 언덕을 따라 소규모 도시국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폴리스 시민들은 주로 지중해 바다에서 어업과 상업에 종사했다. 상업을 위한 화폐의 통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 다양한 문화권과의 교류를 통해 그리스 시민들에겐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자리잡혔다. 이러한 지리적 현실과 삶의 방식에서 권력의 집중화는 일어나기가 힘들다. 그리스 시민들에게 정치는 권력자가 거대한 공동체를 법으로 통제하고 권위와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신 도시 내부의 갈등과 국가 간의 이해관계를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공적인 사안은 직접 투표로 결정하고 문제 있는 정치인은 아테네에서 쫓아내기 위해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투표를 했다. 교과서에서 도편 추방제란 말을 들어 본적이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국가 중 아테네를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이자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뽑는 것은 그래서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정치란 공적인 주제를 다 같이 투표로 결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양 문화권의 뿌리는 중국의 농경 문명에 있다. 드넓은 평지에서 벼농사를 지으려면 서로 돕는 협력이 필요했다 농사를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농사에는 추수와 모내기 같이 정해진 시기라는 게 있다. 짧은 시기에 할 일이 많기 떄문에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자연스레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삶의 방식과 공동체주의가 발달했다. 이와 함께 농사를 위한 도량형과 치수의 통일,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는 자연스레 강력한 왕권으로 이어졌다. 정치의 한자 어원에서도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政(정사 정/칠 정. 정사, 조세, 법규) 治(다스릴 치)
한자 문화권에서 정치는 권력자, 지배자가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세금을 부과한다는 뜻이다. 政(정사 정) 자는 다시 政(칠 복)자와 正(바를 정)으로 나뉘는데, 황제가 옳고 그름을 구별하여 그릇된 자를 처벌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治 (다스릴 치)자는 다시 氵(3획자 부수)와 台(별 태)자로 나뉜다. 하늘에 떠있는 별만큼 높은 황제가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렇듯 권력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며 하늘의 대리인인 황제가 법과 채찍으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이 정치의 사전적 정의다. 정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 간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서양 문화권과는 출발점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자연스레 중국에서는 넓은 땅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강력한 황권을 둘러싼 전쟁이 끝이질 않았다. 그 속에서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 평등적 인식이 발전했을리 만무하다.
남경태의 <종횡무진 역사>에서는 서구 문화권이 개인의 자유와 인권, 평등을 중요시하고, 동양 문화권에선 공동체 정신과 질서, 강력한 왕권이 나타나는 원인을 지리에서 찾는다. 지리적으로 단절되고 농업에 불리한 지중해의 기후의 도시국가들은 상업과 어업에 전념하는 해양 문명권에 속한다. 그리스의 번영도 잠시, 지중해의 폴리스 연합체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 대왕에게 합병된다. 이후 오리엔트와 그리스 두 세계가 하나로 융합된 신문화로 발전했는데, 이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른다. 폴리스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난 헬레니즘 문화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하는 세계주의로 발전했다.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도교에서 유래된 헤브라이즘 문화와 함께 서구 문명의 정신적 뿌리로 발전했다. 서구 유럽도 민주주의가 정착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헬레니즘을 통해 이후 민주주의를 위한 정신적 기반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추구하는 계몽주의가 서유럽에서발전한 이유도 헬레니즘 문화가 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서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 가치와 개인주의 문화는 그들의 특정한 지리적 요인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니 미국과 서구가 세계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주입하려는 시도는 반감을 살 수밖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서구 문화권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채 민주주의 가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예언까지 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유일한 대항마였던 사회주의의 구 소련이 무너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
반면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이를 반박하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끝났지만 새로운 형태의 갈등과 분쟁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새뮤얼은 공산주의의 빈 자리를 민족주의와 종교적 극단주의가 채울 것이며, 문화적 차이가 클수록 갈등도 심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지리적으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갈등이 심한 곳에서 분쟁과 테러, 인종청소가 발생한 것을 보면, 헌팅턴이 옳았다. 서구 문화권에서 민주주의의 전제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타 문화권에선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3세계 국가의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와 서구적 가치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위협하는 침략자에 불과했다.
앞서 보았듯이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권과 동양의 공동체 문화권은 정신적인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제도 이전에 문화 차이가 있고, 문화 차이의 궁극적 원인에는 지리적 요인이 있다. 민주주의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지리적 요인으로 촉발된 천 년 이상의 문화와 가치관 차이가 단기간에 제도로 정착되기엔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이 대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유교 문화권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군부 독재 시기를 거치고 아시아 언론자유도 1위의 국가가 되었다. 역사에는 점프가 없다는 말이 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덕분에 지금 우리는 누구나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고 자유로운 투표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주변 국가들은 자신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걸 보고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을 모르는 셈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세계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중상위권 정도는 된다. 그러니 조금은 자랑스러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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