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진리는 불변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보기에 눈에 보이는 사물의 현상은 언제든 바뀌고 주관적이기에 믿을 수 없었다. 따라서 사물에 내재하는 불변하는 속성, 본질을 찾아야 했다. 따라서 철학자들에게 본질이 무엇인가 탐구하는 과정은 필수적이었다. 모든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의 의미와 그 출처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서로 달랐다.
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본질은 어떤 사물의 불변하는 속성 혹은 그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분 짓게 해주는 특성을 의미한다. 본질의 의미에 대해 쉽게 생각하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도 있다. 책상의 본질은 '앉아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도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책상 말고 탁자나 소파에도 앉아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책상만이 앉아서 글을 쓰게 해주는 도구는 아니다. 책상은 책상에 앉아있던 경험과 사회에서 사용하던 언어가 관습적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책상을 보고서 책상이 이렇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트켄슈타인은 이에 대해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은 명확히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본질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플라톤, "개체의 본질은 개체보다 우월하다."
삼각형의 정의는 내각의 합이 180도인 도형을 뜻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완전한 삼각형을 구현할 수는 없다. 아무리 정밀한 컴퓨터가 삼각형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원자 단위에서 보면 내각의 합을 180도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원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현실에서 완벽히 실현될 수 없는 사물의 속성, 혹은 본질에 대해 플라톤은 색다른 입장을 취한다. 완벽한 삼각형은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아닌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데아는 현실이 아니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이다. 이데아는 현실보다 상위 차원에 있으며, 이데아의 불완전한 복사가 현실이다.
이데아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의 그것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보자. 현실의 고양이들은 줄무늬가 노란색인 고양이, 검은 고양이, 개냥이, 러시안 블루 등등, 수없이 많다. 각각의 고양이들은 다 다른 고양이들이다. 하지만 플라톤이라면, 그 고양이들은 고양이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엄밀히 말해 고양이가 아니라 검은 고양이, 러시안 블루인 것이지 고양이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의 고양이들은 '고양이 그 자체'의 불완전한 복사물이다. 이데아에는 고양이, 즉 고양이 그 자체가 있다.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의 '그것 그 자체'를 에이도스라 한다.
불완전한 복사물은 사물뿐만 아니라 관념에도 적용된다. 아름다움, 추함, 행복 등 모든 것들이 현실에서 일시적이고 어설픈 것은 어떤 관념의 이데아가 아니라 그 복사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들은 시간에 의해 변형되고 사라진다. 불완전한 현실에서 사는 우리는 복제품을 진리라고 믿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데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을까? 우리가 이데아의 현존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혹이 육신에 들어오기 전에 이데아의 세계 속에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영혼은 이미 에이도스, '그것 그 자체'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육신에 갇힌 영혼은 점차 에이도스를 망각하게 된다. 하지만 에이도스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사물들을 통해 다시 에이도스를 인식할 수 있다. 이때 에이도스를 다시 깨닫게 해주는 사물은 예술과 이성이다. 플라톤이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기도 하다.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현실이 아닌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동굴에 비친 빛을 바라보는 죄수들의 예를 든다. 동굴에 갇혀서 동굴 밖을 바라보지 못하는 죄수들은 오직 동굴에 비친 그림자만이 현실이라고 믿고 살아갈 것이다. 아직 그림자는 엄연히 말해 사물의 대체일 뿐,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 진정한 사물의 본질은 빛의 세상, 즉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 이데아의 세계에 다시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현실 세계와 현실 너머의 세계, 이러한 이분법적 관점을 이원론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개체의 본질은 개체 안에 존재한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의 그림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그림에서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두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은 사물의 본질이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사물의 본질, 에이도스가 현실이 아닌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은 사물을 초월해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안에 내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이유다.
현실세계를 긍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은 실체에 대한 입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제1실체와 제2실체로 나눈다. 제1실체가 구체적인 개체들, 개별적 사물들을 가리킨다면, 제2실체는 개체들이 속하는 종이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실체, 아리스토텔레스가 속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종이 2실체다. 중요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실체가 현실에 없다면, 제2실체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본질은 제1실체, 즉 현실에 존재한다. 하지만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에이도스, 본질이라는 존재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현실에서, 육체 안에 본질이 존재한다고 보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본질은 육체 안에 태초부터 존재하기 때문에, 육체가 죽으면 본질도 사라진다. 바꿔 말해,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죽는다. 추상적 관념과 사물의 속성조차 현실에 존재한다고 보는 이런 관점을 일원론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적 관점의 차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인간의 본질은 인간에 있다고 본다. 다만 플라톤은 모든 인간들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철학적 관점의 차이는 곧 정치적 관점 차이로 이어진다.
보편성을 강조하는 플라톤의 철학은 자연스럽게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정당화한다. 플라톤은 이성을 통해 이데아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간 철학자가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국가의 가장 꼭대기에는 이성과 지혜를 가진 철학자, 가운데 계급에는 국가를 보호하는 군인, 가장 밑에는 생산을 담당하는 상인을 자리에 위치시킨다. 국가를 인간의 몸에 비유하며, 머리에는 이성이라는 영혼이, 가슴에는 용기라는 영혼이, 배에는 욕구라는 영혼이 사회에 구성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귀족 정치를 옹호한 이유기도 하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자유, 선택, 이성을 옹호하는 철학자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개인의 선택에 대한 자유를 옹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이성과 진보를 믿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어울리는 철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없었다면 서구의 민주주의는 발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5분 교양 >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의 기원, 생각은 어떻게 진화했을까(feat.비트겐슈타인) (0) | 2022.08.11 |
---|---|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에피쿠로스 학파vs스토아학파의 철학적 논쟁 (0) | 2022.08.04 |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책 제대로 읽기 (0) | 2022.07.26 |
도덕의 기원, 인류는 어떻게 도덕을 진화시켰을까 (0) | 2022.07.25 |
글쓰기 차별화 전략 2. 단락의 유형 및 종류 이해하기 (0) | 2022.07.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