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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교양/인문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에피쿠로스 학파vs스토아학파의 철학적 논쟁

by Gamangee 2022. 8. 4.

헬레니즘 시대를 연 알렉산드로스 대왕

쾌락주의로 인식되는 에피쿠로스 학파는 현재의 쾌락을 중시하는 쾌락주의자로 이해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는 공동체적 삶과 평온하고 무소유적인 삶을 추구했다. 반면 스토아학파는 결정론적이고 인과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질서에 따르고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에 다다르는 길이라고 보았다. 


 

 

헬레니즘 시대의 지중해 문명

 

헬레니즘 철학

 

  플라톤이 죽고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리스 세계는 마케도니아에 의해 제패되며 헬레니즘 시대를 맞는다. 혼란과 불안의 헬레니즘 시대 속에서 그리스 철학은 현실의 욕망과 감정을 억제함으로써 행복을 찾으려는 스토아학파와 현재의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대표적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철학적으로 성숙하지만 국가가 사라진 그리스인은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철학을 추구하게 된다. 세계 시민주의라는 헬레니즘 철학이 오히려 개인 속으로 숨어드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현재의 삶을 살아라'

 

헤도네라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어로 '쾌락'으로 표현되지만, 사실 인간의 기쁨과 유쾌함을 느끼는 모든 긍정적 감정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표현이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 의해 느껴지는 행복과 공동체적 삶을 지향했다. 단순히 육체적이고 단기적인 쾌락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게 쾌락이란 무분별한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욕망이 충족되면서 고통이 없고 마음이 편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이면 누구나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공동체에는 여자나 노예들도 동등한 구성원으로 존중받았다. 민주주의의 원형인 고대 그리스에서도 여자와 노예는 평등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투표권도 없었던 걸 보면, 최초의 평등주의자는 에피쿠로스 학파일지도 모른다. 당대의 지도자나 기득권들은 에피쿠로스의 이런 평등적 삶과 그 사상을 불쾌하게 여겼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지식인들로부터 경멸을 받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플라톤으로 상정되는 주류 서양철학의 근본 전제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마음과 신체가 하나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신체는 영혼의 그릇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플라톤 철학의 근본 전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이다. 따라서 신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을 것이다. 인간이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쾌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쾌락이 아닌 불쾌의 원천일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름진 음식이나 술, 성적 대상은 순간적으로 강한 쾌락을 주지만, 인간의 정신을 약하게 만들고 타락시키기도 한다. 반면 입에 쓴 약이나 고된 운동은 순간은 고통스럽지만 장기적으로 인간의 건강과 행복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신체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정의했다. 육체적 향락에만 빠져 있다는 당시의 오해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알 수 있는 말이다. 

 

 

 

 스토아학파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라 '

 

 스토아학파는 에피쿠로스 학파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스토아학파는 세계가 하나의 전체로서 철저한 인과관계 혹은 인과적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다. 따라서 원인을 알게 되면 원인에 따르는 결과 역시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정론을 거부하고 현재를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스토아학파는 결정론을 믿고 우주적 질서에 따르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인간은 전체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자연, 혹은 전체 질서에 일치하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윤리적 입장을 상징하는 아파테이아라는 개념은 이러한 세계관에서 기인한 것이다.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가 곧 아파테이아 상태이다. 나는 전체의 극히 작은 일부분이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은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파테이아는 일체의 인간적 감정으로부터 초연한 상태를 의미한다. 분노와 쾌감 역시 세계가 정해진 인과율을 따르는 과정에 일어난 부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은 운명인 것이다.

 

 이처럼 삶에 대해 초연했던 스토아학파의 태도는 동아시아의 사상과 삶의 태도와도 비슷하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라는 뜻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자 자연적 질서의 부분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스토아학파를 운명론적 철학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이유다.

 

 스토아학파는 인식의 기초에 있는 것은 감각이고 감각의 토대는 물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 로고스가 있어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고 보았다. 사람은 이 로고스적 질서를 자각하여 거기에 맞추어 살아야 하고 그러려면 여러 정념이나 목적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즉 욕망의 절제와 이성으로 질서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끝없이 강한 자극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현대인들이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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